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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는 고기에서 고기다.

8.<번외편>고기 잡는 사람 이야기 <상>

by 태정태세갑근세 2024. 2. 4.

조선시대 백정
조선시대에도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존재했다.

 

필자는 가업 아닌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의 큰아버지께서는 우리 가문이 훌륭한 집안이며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들을 배출했으며 명망 있는 집안이라 소개했지만 전부 먼 옛날 얘기이고 필자의 아버지는 한창 대한민국의 경제부흥 시기에 군청 공무원을 때려치우고 학교 선배를 따라 마장동으로 입성했다. 큰아버지는 매우 분개하시며 할일이 없어서 그런 일을 하냐며 호통을 치셨고 우리 집안에서 백정 질을 하냐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시대가 많이 변하였고 인식도 개선이 됨에 따라 더는 그런 말씀을 안 하시게 되었지만 그 아들인 필자가 마장동을 입성했을 때도 어르신들은 종종 백정이란 얘기를 하곤 하셨다. 직업에 따라 차별이나 멸시를 받는 시대는 아니었기에 화가 나거나 하진 않았지만 저렇게까지 얘기할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여담이지만 어렸을 때 아버지는 집안 행사에 두 팔 걷고 무엇이든 나서셨는데 장남도 아닌 5남이 나서서 돈이면 돈 시간이면 시간을 써서 모든 행사를 챙겼던 기억이 있다. 아마 무시당하던 그 마음에 잘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그렇게 사셨던 것 같다. 그래서 주말만 되면 그 심심한 시골에 끌려다녔던 기억이 있다.

과거 조선은 철저한 신분사회였고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매우 천대 받던 직업이었다. 평민 중 최하류 계층인 노비보다 사회적 인식이 나빠 노비한테도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한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존재한 단어이지만 뜻과 쓰임이 달랐다. 과거의 시대를 어찌 탓하겠는가 하겠지만 이젠 어엿한 직업으로 자리를 잡은 만큼 한번 되짚어 보고자 한다.

- 처음부터 도축업자는 아니었다 -

백정이란 단어가 처음부터 소, 돼지를 잡는 도축업자를 지칭하는 단어는 아니었다. 백정 도축업자로 변하게 된 것은 세종 이후에 일이었는데 그전에는 일반 백성을 뜻하는 말이었다. 백정은 특정 직업군을 뜻하는 단어가 아닌 혈통이나 신분을 지칭하는 말이었기에 모든 백정이 도축업자는 아니고 도축업자라 하여 모두 백정은 아니었다. 백정 안에도 다양한 직업군이 존재하였단 뜻이기도 하다.

현대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백정이란 고려시대 때 존재한 화척이란 무리였는데 이들은 민가를 약탈하고 각종 범죄를 저지르거나 유랑하는 집단이었다. 화척 집단이 조선 초로 넘어오며 백정이 된 것인데 기골이 장대하고 싸움에 능하여 집과 관직을 주어 병사로써 다루기도 하였고 소수는 그나마 적응하여 사회에 녹아들었지만 대부분은 유랑생활하던 때문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도망쳤다고 한다.

태조 이후에는 성종 때까지 이들을 호적에 올려 파악한 자료가 있으며 토지를 지급해 농업을 생업으로 삼게 하려는 정책도 펼쳐졌다. 또한 일반 양인과의 혼인도 적극 장려하며 지방관아에서 적극 찾아내어 이들을 호적에 기재하는 등 철저하게 관리하려 하였다. 고려시대 때에는 고려영토에 살던 이민족들 여진이나 거란족들이 고려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유목 생활이나 수렵으로 생활을 이어 나가며 사냥과 축산, 도축 및 고기 판매업에 일반 농경민 보다 뛰어났으며 그중 일부가 고려사회에 서서히 녹아들며 한반도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도축 기술은 한반도의 정착민보다 뛰어났기에 이 시절만 하더라도 천시나 멸시를 받지 않았다. 농경사회인 한반도에서도 수렵은 존재하였고 이들 덕에 효율적으로 식량을 얻을 수 있으니 귀족과의 계급 차별은 있었지만 이들의 직업이나 생활방식에 차별이 있지는 않았다.

이후 불교가 국교로 서서히 자리 잡으면서 사냥과 육식을 멀리하는 문화가 민간에게도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 자연스럽게 도축을 천시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이민족인 백정들은 안 그래도 사회에 섞이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다시 유목민 생활을 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등의 생활을 시작했다. 다른 나라에서도 백정에 대한 차별은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유독 한반도가 심한 이유는 이민족의 후예라는 이유와 적응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에는 우리가 알다시피 수많은 차별들이 존재하였고 이 백정들을 끌어안으려는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미 양민들 사이에선 이미지가 매우 나빠져 계속 반목하는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의외로 백정들은 돈을 많이 모으는 계기가 있었는데 농경사회에서 소는 귀중한 자원이기에 나라에서 허가를 받고 도축을 진행하였다. 잔치나 제사를 지내는 양반들은 허가 없이 백정에게 몰래 일을 의뢰하였고 비밀리에 진행하였기 때문에 돈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신분상 집과 재산, 옷차림의 규제를 받는 천민이었기에 돈이 나갈 일도 없었고 납세의 의무도 적었기에 거부 백정들이 생겨나 일반양인이 백정행세를 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시대에 변화에 맞춰 신분제가 폐지되자 이들은 재산을 마음껏 쓰기 시작했는데 이들과 이들의 자손이 '형평운동'으로 자신의 신분을 벗어나고자 애를 썼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들을 주민등록부에 도부 라적고 붉은 점을 찍어 이들을 여전히 신분으로 차별하였는데 이것에 반발에 일어난 것이 형평사운동 이라 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차별은 계속되었으니 후에 항일 의병이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백정은 차별을 받았는데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며 같이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받다 보니 신분에 대한 것을 신경을 쓸 여유가 없으니 점점 사글어 들었다.

 

하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