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편에 이어 고기 잡는 사람, 흔히 알고 있는 백정에 대해 계속 써 내려 가보겠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항일운동 당시 점점 약해진 사회 기반 때문에 신분에 대한 차별은 차츰 사라졌으나 오랜 기간 남아있던 관습들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양반의 신분으로 차별에 맞서 싸운 사람도 있었는데 독립운동가 강상호가 그들과 함께했다. 이처럼 역사를 들여다보면 천대받던 백정들은 끊임없이 자기 삶에 굴하지 않고 사회에 인정받기 위해 싸워나갔다.
- 강상호를 그리며 -
1887년생인 그는 일찍이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국채보상운동에 나서기 위해 국채보상회 경남지부를 설립하고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항일연설을 하였다. 3.1운동에도 참여하기 위해 동지들을 규합하고 만세 시위에 진행했고 이 때문에 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출소 후 백정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백정 출신의 장지필, 이학찬과 형평사를 조직하여 백정 차별은 부당하며 조선 전체의 해악이라며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자 호소했다. 식민지 상황에서 같은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 통치를 돕는 일이라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형평사 운동을 좋게 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많은 반발과 고초를 겪었지만 그는 "인간은 저울처럼 평등하다"라는 신념으로 자기 재산을 형평사에 투자하였고 조선의 많은 백정들은 그를 존경하며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형평사 안에서도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고 형평사 일부 지부에서 친일을 돕는 변절행위를 하기도 해 아예 교류를 끊었다. 해방된 이후에도 과거의 행적들 때문에 좌익인사로 분류되 특무대나 경찰서에 불려 다니며 행동에 제약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보도연맹에 휘말려 고향인 진주를 벗어나 어렵게 생활하였고 전쟁이 끝난 뒤 진주로 돌아왔지만 좌익인사로 분류된 그는 말년까지 당국의 조사에 휘둘리며 말년을 불우하게 보내다 57년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날에는 전국에서 모인 백정 출신의 인사들이 모여 9일장을 치렀다. 장례는 끝없는 만장의 행진으로 이어졌고 진주 시내에는 그를 기리는 사람들로 가득하여 사람들의 홍수로 넘쳤다고 한다.
사후에는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실 때문에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지만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 70년 산업화, 새마을 운동 -
전쟁이 끝나고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전 까지도 큰 변화는 없었지만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면서 지방에서 양반, 평민, 백정 상관없이 그들이 모여있는 지역들은 전부 새롭게 바뀌었다. 나라가 초기화되듯 신분제도는 완전히 뿌리뽑히게 되었다. 신분에 상관없이 자기 능력만 있다면 인정을 받는 분위기를 타며 백정이나 노비를 천대하지 않게 됨에 따라 차별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비록 북방의 이민족이었지만 6.25 전쟁과 산업화로 인해 정착한 그들은 완전히 동화가 되었고 혈통에도 섞이기 시작해 완전한 한국인으로 변하였다.
단지 남아있는 것은 일반 국민들 사이의 차별이었는데 직업으로 인정을 받는 육가공 기술자였지만 자신의 직업이나 직장을 공개하는 것은 꺼렸다. 한때 필자도 직업을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또래들 사이에서 백정이라며 말하는 경우는 없었는데 아무래도 뼈에 새겨진 알게모를 차별받지 않을까에 대한 인식이 남아있었다. 지금은 고기 잡는 일 한다고 하고 다니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 변화된 인식, 그래도 꺼려지는 일 -
2010년대에 들어서는 육가공 기술자들이 방송에 많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이젠 당당히 얼굴도 내보이며 일하는 모습도 나오고 특히 EBS 극한 직업 육가공공장 편에 소개되어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동안 고기를 소비하는 모습만 비치다가 생산하는 모습들이 본격적으로 방송에 나오니 신기하면서도 기술자들의 땀과 기술들이 잘 소개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또한 요리하는 이른바 '쿡방'이 대세가 되며 요리사들이 직접 고기를 잡거나 기술자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재료를 구하는 모습들이 전문직으로서 많이 비쳤고 국가 자격증으로 식육가공기사도 신설되어 완전히 자리 잡은 모습을 갖춰졌다.
여전히 안 좋은 인식이 존재하는 이유는 과거처럼 백정에 대한 인식이 아닌 직업 자체가 3D업종이기 때문이다. 돼지는 80kg~120kg까지 하며 소는 350~500kg이 넘는 것도 있다. 물론 직접 다 들고 다니는 경우도 있고 윈치를 사용하여 이리저리 옮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사람 손을 타고 육가공 공장은 보통 새벽 4시부터 시작해 12시간 근무를 한다. 과거에는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 없이 일하는 것이 당연하였고 임금도 매우 낮았다. 낮았다. 기술을 배운다는 명목하에 저임금에 고강도 노동으로 웬만한 젊은 사람들은 다니기 꺼려진것이 당연하였다. 필자도 처음 마장동에 들어갔을 때는 13시간 정도 근무하며 일요일 하루 쉬고 일하였다.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버티면서 일을 했다.
다행인 것은 과거에 비해 근무 환경이 많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던 기술자들은 돈을 벌어 집도 사고, 건물도 올리며 부를 쌓았고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 자녀들에게 물려주었는데 젊은 사장들이 나서서 근무 환경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더니 임금도 많이 상승했고 근무시간의 변화도 가져왔다. 아직 다른 직업처럼 변하려면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인식이 변하고 자리를 잡은 과거처럼 변할 것이라 생각한다.
- 마치며 -
어쩌면 이번 글을 쓰며 과거의 모습이 종종 떠올라 감정적이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자료조사와 공부를 하며 느낀 것이지만 육가공기술자, 백정 무엇이라 불리든 이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멸시와 차별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았던 백정의 모습을 생각하며 이번 편을 끝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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